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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의 집.

 

나는 제법 오래된 집에 살고 있다. 조부모가 살던 집으로, 정확하지는 않지만 70년대 어느때인가 부터 살고 있는 집에서 나는 살고 있다. 아마 이 집에서 나의 조부모는 8남매를 낳았고 국수를 말아 팔며 키웠다. 막노동을 하다 실족하여 허리를 부러뜨리고 이 자리에서 앓다 죽었다. 허나 살다 죽은 그 무렵에도 원래처럼 집은 남의 것이었으며 아비없는 가족은 쫓겨나기 직전이었다. 아비의 목숨값을 대신하여 농협에 취직한 둘째 아들은 어렵사리 돈을 빌려 그 땅을 벌었다. 이천여만원 이었다지. 그렇게 큰아들은 빚을 졌다. 하지만 맘처럼 안되던 인생에 성의라곤 없던 장남은 그 빚을 갚을 여력도 의지도 아마 없었을 것이다. 허나 어쩌다보니 오래지않아 자신의 동생에게 땅과 집값을 지불하며 어미의 국숫집과 아비의 병상을 얻었다. 자신의 장자의 목숨값으로 받은 돈 몇천이었다. 그렇게 주워든 집은 지금까지도 크게 변치 않고 이어져온다. 지붕위에 지붕을 얹었고 낡은 틈에는 시멘트를 채워넣은뒤 페인트를 덧발랐다. 지을 당시에는 언덕위, 동네에서 가장 높은 곳의 집 이었으나 세월이 수십년 지난 지금은 몇층짜리 건물들 사이에 처박혀서 반쯤 땅에 가라앉은 꼴이 되어있다. 집은 오래되었고 나이가 들었다. 사람이 숨쉬어 살기에 낡지는 못했지만 나이가 들었다. 아주 오래된 집이다.

나는 이곳에 이사오던 때를 기억한다. 조모가 죽고나서 오래 비워둔 집을 몇 인가의 세대에 세를 줬었다. 화장실로가는 나무문은 크레파스로 낙서가 빽빽했고 낡은 벽지는 우중충하게 물들어 갖은 때가 스며들어 있었다. 아주 낡은 가난이었다. 이사를 들어오며 벽지를 모조리 뜯었다. 두겹세겹 족히 너댓겹은 될 법한 종이벽지들을 하염없이 뜯자니 오래된 신문지가 드러났다. 70년대의 어느날. 그 노랗게 오래된 신문지 쪼가리를 마주하고 나는 어안이 벙벙했던 기억이 난다. 그 오래된 신문지 방은 지금 내가 타자를 때리고 술에 취하는 방이 되어있다. 그때와 같은 게 없지는 않지만 비슷한 부분은 그다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멍한 시선, 익숙한 모습뒤로는 항상 그 낡은 신문지가 또렷하게 읽힌다. 바른 것은 새롭지만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그때의 내가 없는 우리는 가난했고 처절했다. 지금의 나 역시도 마찬가지다. 내 시간이 낡아간다. 붙잡을 수 도 없겠지만 행여 잡아본 들 할 것이 없다. 노랗게 낡아간다. 더 이상 신문이 아니게된 70년대의 그 노란 종잇장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