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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선가시 살다보니 삼켜야 할 것이 많다는 걸 깨닫는다. 적지않은 나이임에도 이제서야 새삼 깨닫는다. 내가 어쩔 수 없던 것들, 내 손에서 일어나지 않았던 것들. 하지만 나도 괴로워해야 하는 것들. 이리저리 쥐고 돌려보아도 삼키고 넘겨서 저 밑으로 가라 앉혀야 하는 것들이다.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이고 극적으로 나아질 수 도 없는 것들이다. 지금처럼 괴로울 뿐이다. 하지만 내려가기는 커녕 좀처럼 목구멍으로 넘기기도 쉽지 않으니 머리만 내젓는다. 되짚어보면 나는 삼킬 줄도, 삭힐 줄도 모르고 살아왔다. 제 좋을대로 살아왔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영하의 날씨, 해가 중천일 무렵부터 시작된 두통은 나아지질 않는다. 헐떡이는 가슴이 부담스럽다. 그래도 다행인 건 술에 적셔 날리진 않았다. 희석시키지도 내뱉지도 않았다. 이대..
외로음 나는 오늘 외로워서 울었다. 흥청거리는 간절한 노래사이로 시큰하게 파고드는 외로움이 서러워 나는 울었다. 남은 시간이 더 많아 서운했다. 사랑을 하고 있다 말하지도 못하는 서늘함에 서러워 울어버렸다. 혀를 말아 틀어막는 목구멍 사이로 흐느낌이 피식 새어나왔다. 양껏 숨을 말아먹어 울음을 틀어막지만 오히려 풀뜯는 짐승의 소리와 비슷해져 버렸다. 옆방의 이름 모를 누군가는 찬가를 부르고 나는 행여 내 울음이 들렸을까 기대해본다. 이어지지 않는 내 노래가 서러워 나는 울었다. 나는 더 외롭게 남겨질 것이다. 그 위를 실로폰 걷듯 걸어가야지. 그래도 울음 젖은 소매는 싫으니 손수건을 새로 사야겠다. 딩동댕동 훌쩍훌쩍. 딩동댕동 흥흥흥흥.
50년의 집. 나는 제법 오래된 집에 살고 있다. 조부모가 살던 집으로, 정확하지는 않지만 70년대 어느때인가 부터 살고 있는 집에서 나는 살고 있다. 아마 이 집에서 나의 조부모는 8남매를 낳았고 국수를 말아 팔며 키웠다. 막노동을 하다 실족하여 허리를 부러뜨리고 이 자리에서 앓다 죽었다. 허나 살다 죽은 그 무렵에도 원래처럼 집은 남의 것이었으며 아비없는 가족은 쫓겨나기 직전이었다. 아비의 목숨값을 대신하여 농협에 취직한 둘째 아들은 어렵사리 돈을 빌려 그 땅을 벌었다. 이천여만원 이었다지. 그렇게 큰아들은 빚을 졌다. 하지만 맘처럼 안되던 인생에 성의라곤 없던 장남은 그 빚을 갚을 여력도 의지도 아마 없었을 것이다. 허나 어쩌다보니 오래지않아 자신의 동생에게 땅과 집값을 지불하며 어미의 국숫집과 아비의 병상을 얻..
월간 윤종신 나는 노래를 부르는 것이 좋다. 취한듯 하는것도, 고뇌하듯 하는것도 좋다. 신나 부르기보다는 슬픔에 젖어 부르는 게 더 좋다. 비극에 취한 주인공 같은 어중간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저 아마 내가 짜낼 수 있는 가장 익숙하고 가장 생생한 감정이 그쪽이기에 그럴 뿐. 난 이승열의 음악을 아주 아끼고 사랑한다. 감탄이 나오고 얼마든지 젖어들 수 가 있다. 아주 좋아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서 가장 가깝다고 느끼고 아닌 척 연모하는 것은 윤종신의 노래들이다. 윤종신의 곡들은 선명하다. 수려한 음에 아주 적나라하고 솔직한 가사를 가져다 놓았다. 곡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솔직함, 그 솔직함이 가장 큰 매력이고 아름다움 아닌가 한다. 꽤 많은 곡들이, 사실 느끼기로는 대부분의 곡들이 사랑에 대한 이야기지만..
자살마렵다가 입버릇인 남자에 대하여 그는 올해로 서른을 열심히 넘고 있는 남자다. 좋은 대학을 나와서 외국계의 썩 괜찮은 직장에 일찌감치 자리를 잡았지만 일하는 것이 즐겁다거나 하는 쪽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유능한 사람이었고 능숙하게 자리를 잡았다. 이렇게만 보면 얼핏 성공한 인생이라는 듯한 느낌이지만 특별히 더 행복한 남자는 아니었다. 나이가 그렇게 되었지만 제대로 사랑을 해본적은 없었고 그나마도 여유가 생겨서 시도를 했을 무렵엔 연락이 쉽지않은 직장탓에 제대로 연애기술을 실패할 시간조차 없었다. 이십댓년을 삶의 훌륭한 지침으로 살았던 아버지는 여러가지 면에서 그에게 배신감을 안겨주며 슬슬 광을 내야할 가정을 부숴버렸다. 친구가 있고 후배가 있지만 가까이에 두고 같은 공기를 공유하는 이는 멀었고, 같은 취미가가 있었지만 오..
고향이 아닌 밝고 외로운 그곳은 어떻습니까 나는 삼대가 농사짓는 시골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결코 도회지라고도 할 수 없는 어중간한 시골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물론, 서른의 중반을 짚는 마당까지 한자리에 배고 눕지는 않았다. 뭐 지금은 고향에서 눕고 일어나고 있지만. 고향의 안락함에 어스름해져버린 기억이지만 그래도 잊을 수는 없는 그날들을 되새겨 본다. 분당선 중간 어드메쯤에서 멈추는 그곳은 낮고 비좁은, 그리고 언덕이 답답하던 곳 이었다. 단칸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방을 반으로 또 쪼개서는 책상밑에 다리를 쑤셔넣은 방이었다. 창문 한짝을 둘이 나눠쓰는 아슬아슬한 숨통이 있던 곳 이었다. 낮에는 좁은번화가에 노인들이 넘쳐났고 밤에는 배달 오토바이 신음조차 뜸해지는 곳 이었다. 번화한 곳이었는데 모퉁이 구석구석까지 고독이 들어찬 곳 이었다. 나는 비스..
장고 악수 하루에 한줄, 하다못해 이삼일 나절에는 하나라도 써보겠다고 나름 마음 집어먹고 시작한 글쓰기인데 어렵다. 어떻게 쓰면 좋을지, 무엇을 얼마나 쓸 수 있을지 머리를 굴리다보면 시간이 새벽 세시다. 막연히 미뤄진다. 까짓거 똥이라도 좀 싸면 어떻냐는 심정으로 갈겨보고도 싶지만 금새 한계가 느껴진다. 내가 쓸 수 있는 건 결국 나일 수 밖에 없다. 나는 좁고 얕은 삶을 사는지라 내가 아니고서는 도무지 글을 쓸만큼 아는 것이 없는 것이다. 결국 할 수 있는 건 되새김질 같은 자기관찰인데 눈알을 좀 안으로 굴리자치면 포기가 빠르다. 도무지 합이 안 맞는 것이다. 행여 쓸모 없는 자괴바른 자책같은 것만 새벽녘에 늘어놔봐야 무슨 의미가 있는가. 어렵다 어려워. 아마도 나는 특히나 더 어렵구나.
만둣국 점심에 만둣국이 나왔다. 싸구려 작은 냉동만두 서너개가 익숙한 희멀건 국물에 동동 떠 있다. 제딴에는 파도 좀 썰어넣고 애를 썼다만 식판에 담아 먹는 회삿밥이라는게 애를 써본들이다. 요새는 보기힘들어진 프리마가 문득 떠오른다. 인제는 크리머라고 하던가. 호록하고 한술 떠보니 맛이 아리송한게 익숙하다. 휘적휘적 젓가락질 몇 번으로 만두부터 건져낸다. 애초에 공장에서 만든 국물을 끓여 담고는 미리 데쳐놓은 만두를 두어개 던져넣었을 뿐이다. 이걸 만둣국이라고 하면 아침시리얼은 콘푸로스트국이다. 잠깐, 그렇게도 볼 수 있으려나? 만두가 말라간다. 수저가 담긴 것은 이제 아마도 곰탕이고 설탕 커피없는 믹스커피다. 깨작거리던 입질이 조금 바빠진다. 고깃국은 좋아하거든. 그러다 문득 내가 만둣국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